수상한 한때를 보내고 있다. 지난겨울 이후 좀처럼 집중하지 못하고 있다. 혼란스런 정국, 과도한 스마트폰 사용에 따른 도파민 중독, 마흔 중턱을 넘어선 나이 등등 이유야 많겠지만, 이유야 어떻든 책 한 권 진득하게 읽지 못하는 형편없는 상태에서 허우적대는 중이다. 분명 좋은 시절이 있었다. 원고지 스무 매쯤은 앉은 자리에서 해결할 수 있었다. 새벽까지 책에서 눈을 떼지 못하...
울적한 새벽에 나는 집을 뛰쳐나와 LP바로 향했다. 계단을 천천히 걸어 내려가자 음악 소리가 점점 커졌고 ‘아, 좀 살겠다’ 싶었다. 문을 열면 호떡 뒤집듯 내 기분이 바뀔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안으로 들어서니 60대쯤 되어 보이는 남자 주인이 벽면 가득 빼곡한 LP판을 배경으로 서있었다. 정갈하지만 지루하지 않은, 어딘가 자기만의 멋이 있는 중년 신사였다. ...
“늦게 피고 싶다면 마음껏 늦으렴.피고 싶지 않다면 숨어 버리렴.네 멋대로 해도 너는 결국 핀단다. 피지 않아도 너는 너로서 아름답단다.” 왜 이렇게 느리게 걸어? 너는 멀리서 보기만 해도 알 수 있어. 앞발을 천천히 디디고 뒷발은 끌지. 어려서부터 걸음이 느린 편이었다. 그래서 걸음에 관한 핀잔이나 지적을 자주 듣곤 했다. 게다가 먼 곳을 보며 걷는 버릇이 있었다. 나는...
1983년 3월호 사람 개개인마다 봄을 맞는 느낌이 다른 것 같다. 날씨가 풀리면 봄이려니 하고 단순히 계절의 감각을 표하는 사람도 있거니와, 개화하는 봄꽃을 보며 봄을 맞는 이도 있다. 시골을 떠나 콘크리트 건물 안에서 바쁜 시간에 시달리며 보낸 세월이 벌써 7년이나 된다. 초등학교 시절, 진달래 피고 새싹 돋아나는 산길을 걸어 다니던 일이 이젠 먼 옛날처럼 느껴진다. 나...
여사님이 커피를 한 잔 얻어 마실 수 있겠냐고 연락을 해왔다. 나는 물론이라고 허락했다. 그녀는 내 마사지 손님으로 같은 아파트 단지에 거주했다. 나는 그녀의 겸손한 태도와 교양 있는 언행을 선망했다. 그녀와 사적인 만남은 처음이었던 터라 나는 의아하게 생각하며 여사님을 맞이했다. “바쁜데 폐를 끼치는 건 아닌지 모르겠어요”라는 여사님의 말에 나는 괜찮다며 커피를 내드리고 ...
이름 윤창오(75)가게 화창경정비폐점 예정일 12월 경 동네가 한적하지요? 철거를 앞두고 주민들이 하나둘 떠나니 아무래도 예전 같지는 않아요. 그래도 찾아오는 손님들이 있어 매일 아침 9시부터 저녁 7시까지 카센터에 나와 있어요. 1993년부터 영업을 해오고 있으니 자그마치 30년 세월 동안 한자리를 지켰네요. 그만큼 제게는 이문동이 참 각별해요. 처음 카센터 문을 열었을 ...
그림 · 손승배 “저의 챕터는 여기서 막을 내리지만 로에베의 이야기는 계속될 것입니다. 제겐 집과 같았던 로에베가 계속 성장하는 모습을 자랑스럽게 지켜보겠습니다.” 올봄, 패션계를 떠들썩하게 만든 패션디자이너가 있다. 180여 년 된 유서 깊은 스페인 브랜드 ‘로에베’의 디자이너로 10년 넘게 활동한 조나단 앤더슨이다. 실험적인 디자인으로 브랜드의 정체성을 한 차원 높게 도...
내가 가진 염주는 어머니의 유품이다. 불자였던 어머니는 어디서든 염주를 손에 꼭 쥐고 다니셨다. 그러나 어머니와 달리 나는 염주를 서랍 속에 간직하고만 있다. 그러다 간간이 한 번씩 꺼내어 보며 그날의 일을 반성하곤 한다. 40여 년 전 마칼루 학술 원정대의 학술 요원으로 네팔에 방문했을 때의 일이다. 에베레스트 남동쪽으로 약 20km 떨어진 마칼루는 세계에서 다섯 번째로 ...
이해인 수녀가 오리여인에게 1 4월에 보내준 오리여인의 글을 반갑고 고맙게 잘 읽었습니다. 실수로 압정을 밟아서 피가 난 일은 즉시 처치해서 괜찮았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가끔은 손가락 통증으로 괴로울 적이 있지만 아직은 견딜만합니다. 요즘은 잠을 깊이 못 자는 건지 일찍 잠자리에 들어도 새벽 2, 3시경에 눈이 떠지곤 합니다. 오늘 아침에 일어나 거울을 보니 얼굴이...
〈벌새〉의 김영지 선생님께 바야흐로 완연한 봄날입니다. 오늘은 특히 볕이 좋길래, 일과 중 일부러 짬을 내어 나무 벤치에 앉아있었어요. 타이머를 10분 맞춰 두고서요. 좋은 날 웬 타이머냐고요? 15분 뒤부턴 길고 지루한 회의가 예정되어 있었거든요. 의무와 책임뿐인 어른으로 사느라 안절부절 종종걸음인 저에게 그 10분마저 없었더라면 오늘 하루가 잿빛이었을 거예요. 그런데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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