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 전부터, 한강을 달리기 시작했다. 뜻하지 않은 일들로 고민과 갈등이 많던 시기였다. 성격이 예민해 작은 일에도 쉽게 짜증을 내고, 기대했던 대로 일이 풀리지 않으면 분을 삭이지 못하는 편이라 괴로움이 커지기 일쑤였다. 그러다 중년에 접어들자 주변 사람들을 친절하게 대하며 보다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두운 기분을 밖으로 드러내지 않고 스스로 해소해야겠...
낮에는 입시학원 원장으로, 밤에는 작가로 열심히 살아온 탓일까. 마흔의 나이를 넘기면서 갑자기 시야가 흐릿해졌다. 노안이 일찍 온 거라 짐작했지만 뜻밖에도 병원에서 ‘유리체 출혈’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치료하면 되지, 무슨 걱정이야?’ 스스로를 애써 위로해봐도 세상을 깊게 바라봐야 하는 작가로서의 삶을 더이상 지속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은 커져만 갔다. 예상치 못하게...
요즘 나는 영화 인턴 속 주인공 ‘벤’과 비슷한 일상을 보낸다. 정년퇴직 후 그동안 쌓아왔던 경험을 바탕으로, 한 중소기업에서 경영을 맡아 직장인으로서 제2의 삶을 살고 있다. 회사가 울산에 있어서 평일에는 경기도에 사는 식구들과 떨어져 지내야 하지만 일도 재밌고 좋은 동료들이 많아 하루하루가 즐겁다. 가족과 만나는 주말이 다가오면 기분이 한껏 들뜬다. 매주 금요일, SRT 열차를...
저녁마다 걷기 운동을 하러 나가는 동네 공원엔 나처럼 걷는 사람들이 많다. 그중 ‘유모차 할머니’는 내게 특별한 이웃이다. 처음 할머니를 마주쳤을 때 백발이 성성하고, 허리가 기역자로 심하게 굽어 유모차 없이는 조금도 서있기 힘들어 보여 마음이 쓰였다. 아흔은 족히 넘은 것 같은 할머니는 거동이 불편한데도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산책을 나오셨다. 키 작은 유모차...
2월의 태양이 따사롭게 대지를 비추던 어느 휴일, 자전거를 타고 운동을 나갔다. 새봄의 기운이 깃든 농수로와 논두렁을 지나 한적한 길로 접어들 무렵, 어디선가 들려오는 음악소리에 마음속에 살랑 봄바람이 불었다. 가만히 들어보니 이용의 잊혀진 계절이 노랫말 없이 반주만 흘렀다. 아름다운 멜로디에 홀려 나도 모르게 음악이 들려오는 방향으로 발걸음이 향했다. 길 끝에서 마주한 건 허름한 컨테이너 안에서 드럼을 치고 있는 불혹의 한 사나이였다. 투박하고 서툰 솜씨지만 그의 눈빛은 사뭇 진지했다. 나는 방해하지 않으려고 멀찍이 서서 드럼 연주에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자신의 잊혀진 계절을 만회라도 하려는...
“와, 진짜 비 와? 최악인데?” “조금 더 내려서 훈련이 취소되면 좋겠다.” 투두둑 떨어지는 빗방울처럼 내 기분도 바닥으로 가라앉았다. 버스가 끝없는 산길을 오르고 눈이 초록빛에 익숙해질 무렵, 공포의 유격장에 도착했다. 군 자대배치 후 첫 유격 훈련 때의 이야기다. 눈앞에 펼쳐진 수많은 텐트, 흐트러짐 없이 빽빽이 설치된 거대한 텐트 군집은 압도적이었다....
해가 바뀌어 만으로도 마흔 살이 되었으니 나는 누가 뭐라고 해도 이제 40대이다. 아직 이룬 것도, 가진 것도 없는 내가 벌써 이렇게 나이가 들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 생각해 보면 6년 전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때의 나도 내가 서른다섯 살이 됐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새로운 나이에 적응도 하기 전인 1월의 어느 날, 암이라는 달갑지 않은 손님이 찾아왔다. 몇 년 동안...
며칠 전 일요일, 점심부터 속이 너무 쓰리고 아팠다. 먹은 것이라곤 붕어빵과 밥뿐이었는데 속이 불편해지더니 저녁이 되어서는 급기야 장이 뒤틀리는 듯 고통스러웠다. 걱정이 된 딸아이가 잠시 외출한 아빠에게 전화를 걸자 남편은 10분도 채 되지 않아 헐레벌떡 집으로 돌아왔다. 황혼의 문턱에 들어서서 그런지 요즘 따라 마음이 자꾸 약해지고 삶의 회의감이 들 때가 많았다. 별도, ...
처음 서울로 전학을 갔던 초등학교 3학년, 내게 교실은 낯설고 어색한 장소였다. 며칠 째 가만히 자리에 앉아 움츠려 지내던 어느 날, 햇빛에 그을려 까무잡잡한 양 볼에 주근깨가 콕 박힌 여자애가 내게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 “안녕, 나랑 친구하지 않을래?” 그 애의 말투가 너무나 쾌활해 얼떨결에 “그래, 좋아”라고 대답했다. 그렇게 첫 인사를 나눈 후로 우리는 학교에서나 밖...
중년에 접어들면 고혈압, 당뇨, 관절염 같은 지병들에서 자유롭지 못하게 되건만 다행히 난 특별히 아픈 곳이 없다. 대신 내가 오랫동안 달고 사는 병이 하나 있는데 바로 사람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하는 증상이다. 20대 후반에 아내와 소개팅으로 만나 연애하던 시절부터 나의 고질병은 골칫덩이였다. 극장에서 영화를 볼 때면 등장인물들이 잘 파악되지 않아 수시로 아내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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