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는 말레이시아에서 얻은 언니와 동생이 있다. 지금은 각자 다른 나라에서 살지만 우리는 여전히 연락하며 인연을 이어간다. 이게 모두 처음 만난 날 함께 먹은 된장국 덕분이다. 2013년, 나는 말레이시아의 온라인 여행사에 취직이 됐다. 회사에서 구해준 집은 두 명의 한국인 직원과 함께 생활하는 쉐어 하우스였다. 낯선 땅에서 낯선 사람과의 동거를 걱정하는 마음은 그들도 다르...
서울에 갈 때마다 노숙자 자활 지원을 위한 잡지 《빅이슈》를 산 건 약 5년 전부터다. 서울에서 볼일을 마치고 하룻밤 묵기 위해 서울역 근처의 찜질방을 찾아가는 길에 마주친 서울역 노숙자들은 매번 충격으로 다가왔다. 아침부터 광장에 모여 소주를 마시는 무리,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삿대질을 하고 욕설을 내뱉으며 빈병을 아무렇게나 던지는 노숙자 등등…. 어느새 나는 그들을 불결...
2년 전 마흔이 넘은 나이로 직업상담사 공부를 할 때였다. 오랜만에 공부를 하려니 쉽지 않았다. 분명 전날 외운 것도 다음 날이면 기억이 안 나기 일쑤였다. 그래도 이왕 시작했으니 꼭 합격하고 싶어 매일같이 도서관으로 출근해 도서관 구내식당에서 대충 허기를 달래가며 최선을 다했다. 여름이라 밥맛도 없고 유난히 지치던 어느 날, 여느 때와 같이 구내식당에서 겨우 한 숟갈 뜨고...
아동·노인 학대와 실종예방 업무를 담당하는 우리 부서 사무실 테이블에는 사탕 항아리가 하나 놓여 있다. 실종 예방을 위해 ‘지문 및 사전 등록’에 필요한 사진을 촬영하고 지문을 스캔할 때 우는 아이를 달래기 위한 것이다. 때때로 항아리를 들여다보면 텅 비어 있기 일쑤지만 테이블 위에서 사탕 껍질을 발견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사탕들은 모두 어디로 사라지는 걸까? 항아리 속...
지금 생각해보면 결혼 전, 십여 년 동안 연애하며 일 년에 한두 번이라도 어머니께 인사를 다닌 게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모른다. 그렇지 않았다면 어머니는 평생 며느리 얼굴도 모른 채 사셨을 것이다. 두꺼운 안경 너머로 긴 머리의 수줍은 내 모습을 인자하게 바라보시던 그 시절이 지금도 생생하다. 어머니의 세상이 깜깜해져버린 건 우리가 결혼식을 올리기 바로 직전이었다. 당뇨로 ...
“이정기 님, 1차 서류 통과되셨습니다. 다음 주 월요일에 면접 보러 오세요.” 졸업을 앞두고 취업 준비를 하던 지난해 말, 가고 싶었던 회사에서 기쁜 소식을 전해주었다. 떨리는 마음으로 대기실에 앉아 있는데 낯익은 얼굴이 눈에 띄었다. 같은 과 동기 성우였다. 긴장되는 상황에서 아는 사람을 만나면 반가울 법하지만 성우라면 얘기가 달랐다. 대학교 1학년 때부터 캠퍼스 커플이...
나는 30대 후반부터 서울 노원구 월계동에서 작은 구둣방을 꾸려나가고 있다. 고장 났던 신발이 내 손을 거치면 새것처럼 말끔하게 변하는 것만큼이나 이곳에서 수많은 사람과 온정을 나눌 수 있다는 게 기쁘다. 그중에서도 가장 고마운 분은 10년 전 신발을 고치러 온 인연으로 지금까지 가깝게 지내는 손님이다. “여자가 수선해주니까 더 꼼꼼하고 좋네요”라며 우리 가게를 고집하시는 ...
세상을 빨리 구경하고 싶었는지 아기는 예정일보다 한 달이나 먼저 태어났다. 멀리 사는 친정엄마 대신 산후도우미 아주머니가 육아를 도와주었다. 첫 아이라서 모든 것이 서툰 내게 아주머니는 씻기고, 먹이고, 재우는 것 등 하나부터 열까지 다정하게 알려주었다. “내가 원래 아기를 좋아했거든. 손주들을 봐주다 보니까 적성에도 맞더라고. 그래서 이 일을 하게 됐어요.” 아주머니는 ...
“아버지, 시간 나실 때 엄마랑 다 같이 대구 시내에 다녀와요. 네?” 제대를 앞두고 마지막 휴가를 나온 아들이 뜻밖의 가족 나들이를 제안했다. “왜? 제대한다고 옷이랑 신발 사러 가자는 거냐? 시간 없다.”일언지하에 거절당한 아들은 답답한 듯 무엇을 더 말하려다 참는 눈치였다. 사실 아들은 다달이 나오는 군인 월급에서 10만 원씩을 저금한 돈으로 가족 반지를 맞추려는 생...
십 년 전 작은아버지께서 심장마비로 돌아가셨다. 어릴 때부터 한동네에 살며 나를 각별하게 챙겨주시던 작은아버지의 죽음에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장례식장을 지키는 내내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이 쏟아졌다. 둘째 날, 집에 잠깐 다녀오려고 빈소를 나서려는데 신발이 보이지 않았다. 대신 내 구두 색과 비슷한 갈색 구두 한 켤레가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술에 취한 문상객이 바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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