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해 봄, 나는 혈액암에 걸렸다. 오랫동안 치료를 받으면서 나에게 남은 것은 고독, 슬픔, 좌절 같은 쓸쓸한 단어들이었다. 감정을 피폐화시키는 방법을 배운 것도 그때였다. 병든 몸 사이사이로 계절이 몇 번 지나가는 동안 삶은 차츰 세상과 멀어져 갔고, 나는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가끔 화실 햇살이 참새꽁지만큼 남을 무렵이 되면, 낯선 새끼 고양이 한 마리가 지붕을 따라 창가로 내려와 야옹야옹 눈물 앓는 소리를 냈다. 나는 녀석의 턱을 쓰다듬거나, 발톱을 간질이며 같이 장난을 쳤다. 때로 녀석은 내가 그리고 있는 화판에 코를 묻고 반짝거리는 호기심을 나타내기도 했지만 대개는 책상 위에 놓인 땅콩과자를 먹다가 돌아갔다. 고양이가 돌아간 밤이면 수수께끼 같은 빗방울들이 흩뿌렸다.
몇 년 후 다시 봄이 왔을 때, 나를 괴롭히던 혈액암은 흔적을 감추기 시작했다. 병이란 사랑과도 같은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림을 그리는 일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굳이 손 내밀지 않아도 다가오고, 또 사라지는 것. 나는 푸른 물감과 커다란 붓을 들고, 이제는 창가로 찾아오지 않는 새끼 고양이를 생각하며 그림을 그리곤 했다. 세월은 조금씩 흘러갔고, 훗날 낯선 길에서 마주친 고양이는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