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독 출신의 신세대 작가 야코프 하인의 자전적 소설.
통일되기 전의 1980년대 동독에서 청소년기를 보낸 저자의 성장기 이야기를 유머러스하고 경쾌하면서도 비판적인 문체로 그렸다. 소설가 배수아의 첫 번역작.
한국에 처음 소개된 동독 출신 야코프 하인의 ‘나의 첫 번째 티셔츠’는 일종의 성장 회고록이다. 그런데 자신의 과거를 기억하는 야코프 하인의 시선은 지난 날 겪었던 억압적인 현실과 피폐한 삶의 기록에 닿아 있지 않다. 오히려 그 시간들은 도저히 하나의 흐름 속에서 재구될 수 없는 다층들로 벌어져 있으며 뒤틀려 있고 쪼개져 있다.
이 조각들은 ‘장벽 이전’을 모르는 세대들과 이를 마지막으로 경험한 세대의 경험적 차이에서 오는 낯설음과 ‘장벽 이후’ ‘통일’의 이름 앞에 어떻게도 완벽하게 동화될 수 없었던 이질감 속에서 독특한 빛을 발하고 있다. 감옥보다 더 심한 공포에 시달리게 만든 ‘협박’과 ‘감시’, 그리고 이를 직감적으로 느낄 수밖에 없었던 저주받은 육신의 소유자, 야코프 하인.
‘나의 첫 번째 티셔츠’는 티셔츠를 ‘니키’(동독)라고 부르던 시간과 ‘티셔츠’(서독)라고 부르게 된 시간의 ‘사이’에 대한 전무후무한 자기 고백을 담고 있다. 한 인간을 둘러싸고 있는 ‘만들어진’ 것들, 역사적 실체를 강요하는 담론,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허상, 끊임없이 영웅이 되기를 강요했던 교육, 매체가 흘렸던 수많은 거짓말들을 너무도 ‘투명하게’ 내뱉어 놓고 있는 것이다. 특히 그가 민방위교육을 받으면서 느꼈던 치욕은 어린 시절 반공교육이랍시고 책상 밑으로 기어 들어가거나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운동장으로 뛰어가던 기억이 있는 우리에게는 너무도 친숙한 것이다(고백하건대 난 항상 구석에 숨어서 친구와 공기놀이를 했다). 그는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한 고민도 하기 전에 알아야 했던, 아니 알기를 강요당했던 ‘국가’에 대한 것들이 결국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었나를 간단한 몇 가지 에피소드로 예리하게 드러낸다
이 책은 유년 시절부터 청소년 시절까지, 작가 야코프 하인 자신이 겪은 자전적 체험을 에세이적인 문체로 소설화한 것이다. 작품의 화자이며 주인공인 ‘나’는 야코프 하인 자신이며 작품 속 화자의 나이는 여섯 살에서 1989년 통독 직후, 열아홉 살까지인데 그 시공간은 야코프 하인의 기억에 따라 수시로 이동한다. 일반적인 서사의 문법을 의도적으로 파기한 이 작품의 각 장은 연속적으로 이어져 있지 않고 분절되어 있지만,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넘겼을 때는 하나의 커다란 이야기가 만들어진다.
‘나’는 호기심이 왕성하고 감수성이 예민한 소년이다. 개방적이고 합리적인 부모 밑에서 나는 비교적 유복하게 자라난다. 아버지는 작가여서 늘 책을 가까이 했으며 어머니는 영화 산업에 종사하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는 사람이었다. ‘나’는 학교에서 여러 친구들과 선생님들과 어울리는 것도 좋아하지만 TV와 영화 잡지를 보는 것, 그리고 친구들과 어울려 새로운 경험을 쌓고 그 경험에서 얻는 생생한 지식을 더 좋아한다. 나는 다른 친구들처럼, 사춘기에 이르러서는 전혀 연주할 줄도 모르면서 기타와 인기 록 그룹, 여자친구에 관심을 갖기도 하고 학교에서 왕따를 당할까 두려워하기도 한다. 체육을 잘 못하는 나는 체육 시간이 정말 싫고, 매사 무뚝뚝하고 권위적인 콘찜 선생님이 가르치는 수학 시간도 싫어한다. 그리고 의무적으로 폐지와 빈병을 수집해서 제출해야 하는 폐품수집 행사도 경멸한다.
또한 러시아어를 가르치는 군인 출신 로이폴트 박사의 과장어린 무용담을 다소 냉소적인 표정을 지으며 듣기도 한다. 정이 많은 나는 외톨이 되는 친구들한테 먼저 다가가 말도 걸고, 핵전쟁이 일어나면 어떻게 대피를 해야 하는지를 가르치는 민방위교육시간을 경멸하기도 한다.(시대적 배경이 통일 전, 냉전시대이다). 그리고 초강대국이며 자유주의 진영의 대표격인 미국의 대통령한테 항의편지를 보내기도 한다. 그리고 짝사랑하는 여자를 따라서 자신의 꿈을 영화배우에서 정신과 의사로 바꾸기도 한다. 그러는 사이 정치사회적 환경도 바뀌어 서와 동으로 나뉘어 있던 독일이 통일을 하게 된다. 숱한 경험과 반성적 사유, 그리고 상처를 통해 나는 한 사람의 통일독일의 시민으로 성장하는 것이다. 하지만 나에게 정치하면서도 진지한 역사적 의식은 없다.
나는 역사적 자각에서 의도적으로 비껴서면서 분단이라는 그 희극적 공간에 나에게 안긴 기억과 숱한 인상 따위를 냉소적으로 회상할 뿐이다. 이 작품의 제목에 등장하는 ‘티셔츠’는 아이가 자라 자신의 정체성을 스스로 의식하면서 그것을 외적으로 표명할 수 있는 하나의 상징적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티셔츠를 구 동독에서는 니키라고 불렀다. 다시 말하면 티셔츠를 가리켜 니키라고 부른 사람은 동독 출신인 것이다. 나의 첫 번째 티셔츠가 니키였다는 걸 고백하면서 야코프 하인은 자신이 동독산이라는 사실을 공개적으로 공표한다. 그것은 분명히 역사적인 자각이다. 이를테면 성인세계로의 입문인 것이다.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처음 소개되는 야코프 하인은 매혹적인 재능을 가진 문제작가이다. 그의 글쓰기는 역사적 관심에서 의도적으로 비껴서며 개인의 자유를 규제하는 정치적 상황을 유연하게 풍자하는 데서 그 빛을 발휘한다.
소설의 이야기가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유년 혹은 사춘기 시절의 회고담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고, 그 속에서 다뤄지는 주제가 정치적으로 어지럽고 혼란스러운 분단시대 독일 소년의 성장과 사회화 과정(자아찾기)이기 때문에 우리나라에 던져질 수 있는 시사점이 많다. 야코프 하인이라는 한 개성적인 현대 독일의 작가를 국내에 처음 소개하는 기쁨이 크다.
야콥 하인 지음
현재 베를린에서 소아정신과 의사로 일하고 있답니다. 독일 내 저명한 소설가인 크리스토프 하인의 아들이기도 하구요. 아버지는 전통적인 독일 소설의 관념성을 유지하는 작가이지만 야콥 하인은 소위 독일에서는 팝 문학pop literatur이라고 부르는 에꼴로 분류됩니다. 독일 팝문학은 전통적인 근엄하고 설명위주에서 벗어나 사건위주이고 선정적이기도 하고 이국적인 풍물을 이용하고 기타 등등의 특징을 나타내는 젊은이 취향의 문학을 이르는 말입니다. 우리나라로 치면 신세대문학인 셈입니다. 야콥 하인은 독일 소설계에서 매우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작가로 섬세하면서도 방외자적인 감수성으로 독일 사회의 심층을 날카롭게 묘파한다는 평을 받습니다.
배수아 옮김
1965년 서울에서 태어났고 이화여대 화학과를 졸업했다. 1993년 『소설과사상』에 「천구백팔십팔년의 어두운 방」을 발표하며 등단했다. 소설집 『푸른 사과가 있는 국도』 『바람인형』 『심야통신』 『그 사람의 첫사랑』, 장편소설 『랩소디 인 블루』 『부주의한 사랑』 『철수』 『나는 이제 니가 지겨워』 『붉은 손 클럽』 『이바나』 『동물원 킨트』 『일요일 스키야키 식당』 『에세이스트의 책상』 등이 있다. 1990년대 한국소설의 새로운 문법을 개척한 작가로 인정받고 있으며 2003년 한국일보문학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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