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수평선은 왜 멀어지는가
● 정채봉이 세상을 떠나기 전 남기고 간 단 하나의 장편 동화
이 작품은 정채봉이 간암으로 세상을 떠나기 1년 전에 발표한 유일한 장편동화로, 그의 어린 시절 고향, 순천만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쓰여 졌다. 어린이문학평론가 원종찬 교수는 이 작품에 대해 “……쓸 때의 마음가짐이 여느 때와는 달랐을 것이라고 짐작된다. 자신이 살아온 날들을 되돌아보면서, 이 땅에서 계속 살아갈 다음 세대에게 꼭 들려주고픈 이야기를 쓰려고 하지 않았을까.” 하고 이 작품의 의도를 생각해 보며 정채봉이 이 작품을 얼마나 특별하고 소중히 여겼을지 이야기했다. 그만큼 이 작품에는 그가 어린이에게 말하고 싶은 이야기가 어떤 작품보다 진하게 배어있음을 알 수 있다.
다도해의 작은 포구 ‘배들이’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이 작품은 개성적인 인물들이 처음부터 끝까지 살아 움직인다. 마주치는 모든 생명체에게 “안녕.”을 외치는 엉뚱한 소년 ‘계수나무’, 노래를 찾는다며 바람을 쫓아다니는 연순네 아줌마, 다리를 절기 때문에 소리만으로 산을 지켜내야 하는 욕쟁이 목골댁, 낚싯대를 들고 산 위에 올라가서 비행기를 낚겠다고 기다리는 바보 고봉이, 군대에서 도망쳐 나온 순애 삼촌…….
배들이 마을 사람들을 통해 ‘나 사는 곳’의 참모습을 깨달아 가는 계수나무는 정채봉이 말하고자 하는 ‘동심’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준다. 거대한 해일이 마을을 뒤엎어 모든 것이 부서진 자리 위에서도 씩씩하게 일어나 희망의 씨앗을 품는 계수나무야말로 정채봉이 그리던 영혼의 고향, 즉 동심 그 자체인 것이다.
정채봉은 이 작품을 통해 잘려진 매화나무 그루터기에도 새순이 나듯 각박하고 흉흉한 세상 속에서도 동심은 새순처럼 솟아날 것임을, 그리고 그것이 세상을 구원할 것임을 믿고 기다릴 것이라 말하고 있다.
2000년 1월 10일 초판이 출간된 후, 2009년 9월 샘터사에서는 송진헌 화가의 그림을 더해 ‘샘터정채봉전집’ 중 한 권으로 새롭게 출간하였다. 이 작품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던 화가 송진헌은 더 나은 그림을 위해 작품의 배경이 된 순천을 직접 방문하여 정채봉의 생가, 학교, 순천만 등을 몸소 보고 느끼고 왔으며, 그렇게 탄생한 그림에는 작가가 그리워한 순천의 바닷가 마을 모습이 따뜻하고 생생하게 담겨 있다.
● 작품에 대하여
‘나 사는 곳’의 참모습을 보여주는 동화
수구초심(首丘初心)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여우도 죽을 때는 자기가 태어나고 자란 굴 쪽으로 머리를 둔다는 뜻입니다. 정채봉 선생은 장편동화 『푸른 수평선은 왜 멀어지는가』를 책으로 펴내고 그 이듬해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 작품을 쓸 때의 마음가짐이 여느 때와는 달랐을 것이라고 짐작됩니다. 자신이 살아온 날들을 되돌아보면서, 이 땅에서 계속 살아갈 다음 세대에게 꼭 들려주고픈 이야기를 쓰려고 하지 않았을까요? 이 작품은 정채봉 선생의 어린 시절 고향의 이야기입니다. 선생은 이 작품에서 풀포기 하나, 벌레 한 마리에도 더할 수 없이 진한 애정을 쏟아 부었습니다.
어린 아이의 시점으로 된 이 동화는 좀 색다르게 읽힙니다. 작가 곧 어른 편에서 보면 이미 지나가버린 추억 이야기로 읽히지만, 독자 곧 어린이 편에서 보면 지금 눈앞에서 펼쳐지는 성장 이야기로 읽힙니다. 이는 정채봉 선생이 쌓아 올린 독특한 문학세계와도 통하는 것입니다. 선생은 어린이와 동심을 종교처럼 받들었습니다. 어린이와 동심을 통해 잃어버린 본성을 되찾고 참된 깨달음에 다가설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나온 게 ‘생각하는 동화’, ‘어른을 위한 동화’입니다.
하나의 높은 세계를 얻고자 하면 다른 것을 버려야 하는 일이 생깁니다. 선생의 동화에는 확실히 그런 면이 보였습니다. 동심을 그대로 작품의 주제로 삼으려 했기에, 작품 속 어린이가 오로지 순수한 동심을 보여주기 위해서만 움직이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줄거리의 흥미가 덜해서 정작 어린이는 쉽게 다가서지 못하는 동화가 만들어지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 작품은 다릅니다. 어린이 독자는 어린이대로 또 어른 독자는 어른대로 만족할 수 있는 드문 성취를 이루어낸 것입니다. 다도해의 작은 포구 ‘배들이’를 배경으로 개성적인 인물들이 살아 움직이고 있습니다. 마주치는 모든 생명체에게 “안녕.”을 외치는 엉뚱한 소년 ‘계수나무’는 너무 당차고 솔직해서 짓궂은 말썽꾸러기로 찍혔지만, 누구도 미워할 수 없는 아이입니다. 자신을 키워 주시던 외할머니 댁을 떠나 아버지의 본처 댁으로 들어와 살게 되면서 ‘배들이’ 마을 사람이 되고 또 거기 사람들과 부딪히는데, 저마다의 상처와 사연들이 드러나면서 강처럼 굴곡진 이야기를 만들어냅니다. 노래를 찾는다며 바람을 쫓아다니는 연순네 아줌마, 다리를 절기 때문에 소리만으로 산을 지켜내야 하는 욕쟁이 목골댁, 낚싯대를 들고 산 위에 올라가서 비행기를 낚겠다고 기다리는 바보 고봉이, 군대에서 도망쳐 나온 순애 삼촌……. 주인공 소년은 집안 어른뿐 아니라 어딘지 모자라 보이는 이런 마을 사람들을 통해서 ‘나 사는 곳’의 참모습을 깨달아갑니다.
소년의 아버지는 마을 밖으로 떠돌다가 몸과 마음이 망가지고서야 집으로 돌아옵니다. 헛된 욕망을 좇아 밖으로 돌던 어른들은 마을에서도 이방인처럼 겉돌 수밖에 없었습니다. 도시의 환상은 아버지 세대를 패배자로 굴복시키고도 모자라서 ‘배들이’ 앞바다를 메워 돈을 벌려는 개발주의자들을 마을로 끌어들입니다. 자연은 환경 파괴를 결코 용서하지 않았습니다. 인간의 탐욕에 분노하듯 마침내 거대한 해일이 마을을 뒤엎어 놓지만, 모든 것이 부서진 자리에서 계란과 감씨와 무씨를 가슴에 품은 주인공 소년이 “매화나무 그루터기에서 새순이 나온 것처럼” 새로운 삶의 시작을 예고해줍니다. 언제든 기죽지 않는 씩씩한 소년 ‘계수나무’야말로 고향 그 자체임을 그려낸 것이지요. 여기에서 작가의 기억 속 어린 시절을 떠올려주던 ‘계수나무’는 어느덧 작가가 기대하는 오늘의 어린이로 바뀝니다. 지나간 세월의 아픈 추억을 껴안고도 내일의 희망을 품은 결말로 나아간 것입니다.
이 작품에서 한 가지 더 생각할 거리가 있습니다. 정채봉 선생의 동화가 대개 그러하듯이, 변화는 본질에서 멀어질 뿐이라는 ‘동심 곧 고향’의 회귀의식 이 작품에서도 강하게 풍깁니다. 성장과 발전의 이름을 빌린 타락과 훼손은 경계해야 마땅하지만, 안을 살찌우려면 밖과의 교섭도 중요합니다. 그런 점에서 이 작품의 주인공 소년 ‘계수나무’가 ‘배들이’ 출신이 아니라 밖에서 들어온 손님이었다는 사실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진정한 토박이 의식이란 밖으로 열려 있어야 하며 그곳이 어디든 자기가 지금 발 딛고 선 땅에 대한 자각에서 시작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자연에서 나고 다시 자연으로 돌아가는 존재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너무 멀리 떠나와서 돌아갈 곳을 아주 잊고 사는 듯싶습니다. 다행히 어린이들은 아직 자연과 교감할 수 있는 신비한 힘을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 축복의 어린 시절을 애써 등지려고 안달하지는 않는지요? 정채봉 선생은 자연에서 멀어진 세상의 질서를 보고 이렇게 안타까워했습니다.
“왜 지금 아이들은 신비의 그들 세계를 버려두고 비극의 어른들 세상으로 서둘러서 달려 들어가고 있는 것일까. 사라져 간 우리의 아름다운 것들이 꿈속에서라도 자주 부활해 주기를 빌어 본다.”
신비하고 아름다운 꿈속에서라면 우리는 언제든 정채봉 선생을 다시 만나볼 수 있을 것입니다.
어린이문학 평론가ㆍ인하대학교 교수 원종찬
1946년 전남 순천 바닷가 마을에서 태어났다. 수평선 위를 나는 새, 바다, 학교, 나무, 꽃 등 그의 작품에 많이 등장하는 배경이 바로 그의 고향이다.
어머니가 스무 살 꽃다운 나이로 세상을 떠난 후, 아버지 또한 일본으로 이주하여 거의 소식을 끊다시피 해서 할머니의 보살핌 속에 유년 시절을 보냈다.
어린 시절 정채봉은 내성적이고 심약한 성격으로 학교나 동네에서도 맘에 맞는 한두 명의 친구가 있었을 뿐 또래 집단에 끼이지 못하고 혼자 우두커니 앉아 바다를 바라보는 시간이 많았다고 한다. 어린 정채봉은 그렇게 상상의 나래를 펼쳐 나무와 풀, 새, 바다와 이야기하고 스스로 전설의 주인공이 되어 보기도 하는 ‘생각이 많은 아이’였다. 이른바 결손 가정에서 성장한 소년의 외로움은 오히려 그를 동심, 꿈, 행복을 노래하는 동화작가로 만들었던 것이다.
고등학교에 들어간 정채봉은 온실의 연탄 난로를 꺼트려 관상식물이 얼어 죽게 만드는 사고를 치고 이내 학교 도서실의 당번 일을 맡게 되는데 이것이 그를 창작의 길로 인도하게 된다.
성장기 할머니 손을 잡고 ‘선암사’에 다닌 후로 줄곧 정채봉의 정서적인 바탕은 불교적인 것이었으나, 1980년 광주 항쟁 이후로 가톨릭에 귀의하여 가톨릭 신앙은 불교와 함께 정채봉의 작품에 정신적인 배경이 되었다.
동화작가, 방송프로그램 진행자, 동국대 국문과 겸임교수로 열정적인 활동을 하던 정채봉은 1998년 말에 간암이 발병했으며, 투병중에도 손에서 글을 놓지 않고 삶에 대한 의지, 자기 성찰을 담은 에세이집 『눈을 감고 보는 길』과 환경 문제를 다룬 장편동화 『푸른 수평선은 왜 멀어지는가』, 첫 시집 『너를 생각하는 것이 나의 일생이었지』를 펴내며 마지막 문학혼을 불살랐다.
평생 소년의 마음을 잃지 않고 맑게 살았던 정채봉은 사람과 사물을 응시하는 따뜻한 시선과 생명을 대하는 겸손함을 글로 남긴 채 2001년 1월, 동화처럼 눈 내리는 날 짧은 생을 마감했다.
대한민국문학상(1983), 새싹문학상(1986), 불교아동문학상(1989), 동국문학상(1991), 세종아동문학상(1990), 소천아동문학상(2000)을 수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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